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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하고 밋밋하게 반복되는 그저 그런 현상과 풍경의 총체를 일상이라 부른다. 유근택의 지난 작업 여정을 논평하는 일성은 두말할 것 없이 일상이었다. 그의 그림을 일상담론에 기대어 읽어내는 일은 자타가 공인하는 화가의 화두(畵頭)이자 논자들의 화두(話頭)이다. 이 글은 유근택의 일상 개념이 진화해온 족적을 더듬어보면서 일상의 굴레를 넘어서고자 하는 그의 예술적 좌표를 찾아보는 작업이다. 작가에 관한 이전의 비평문들과 그의 작업노트를 토대로 작가와의 인터뷰를 진행하고, 일년 전에 써두었던 그에 관한 짧은 논평을 윤문하면서 유근택의 근작이 가지고 있는 연속과 단절의 국면을 짚어볼 것이다. 일상을 넘어 장면과 사건 사이의 울림을 찾아 나선 유근택의 그림을 조곤조곤 다시 읽어볼 일이다. 

1. 유근택 그림에 있어서 일상이라는 것은논자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유근택 그림에 있어서 일상이라는 것은 대체로 관념적인 역사 의식을 대체하는 개념으로서, 현실의 파장에 보다 구체적으로 다가서고자했던 작가의 생각을 뭉뚱그려 대변하는 개념이다. 이것은 그의 그림이 9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역사에서 일상으로, 과거에서 현재로, 관념에서 현실로 그 중심축을 옮겨온 것을 반영한 결과이다. 하지만 변화의 지점을 모색하고 있는 그의 그림들을 예의 일상 개념으로 규정하고 그 틀 안에서 해석하는 데는 다소 무리가 따를 것으로 보인다. 그의 근작들에 일상과 일탈의 경계를 넘나드는 모종의 변화 조짐이 싹트고 있기 때문이다.

유근택의 그림들은 일상 담론이 이끌어온 90년대 한국 화단의 한 단면을 이루고 있다. 좀더 적극적으로 말하면, 역사성이나 서사성을 가지고 화단에 나선 신예 유근택이 신진으로 발돋움하는 과정에서 그의 이념적 배경으로 작동한 시대정신의 산물로 일상 담론을 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예술이 일상을 담는다는 것은 이전 시대의 시각에 비춰보면 시시하기 그지없고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따분한 것이었다. 하지만 좌표상실의 시대, 이데올로기의 부재의 시대를 풍미한 것은 일상이었다. 아니, 어쩌면 일상은 큰 이야기를 접어둔 방황의 시대를 대치한 조물조물한 이야기였는지도 모른다. 할 말이 없는 시대, 그래도 뭔가 작은 목소리로라도 이야기를 건네야했기 때문이다. 유근택의 작업도 이 과정에서 크게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이 유근택 비평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그의 작업 여정은 일상 담론에 포섭되는 과정과 그것에 매몰되지 않고 서사성을 찾아나가려는 노력이 엇갈리는 탐색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민감한 촉수를 들이대고 삶의 편린들을 들여다보고, 나눠보며, 읽어내서 자상하게 형상화하는, 그리하여 예술가의 숙명과도 같은 당대성을 구현해내는 작업들은 90년대를 지나면서 불임의 시대를 거쳐야만 했다. 퇴행적인 관행을 낳은 불임의 논변으로 그를 가둬둘 일이 아니다. 일상담론의 지배를 받아온 유근택 그림 읽기 작업은 이제 그것을 넘어선 역동적인 파장으로 나아가야한다. 지금껏 관행적으로 생각해온 일상의 모습과는 다른 현실의 파편들과 비일상적인 사건이나 역사적인 것으로부터 유추되는 일탈적 모티브에 대해서도 새롭게 읽어냄으로서 보태야할 이야기들이 많기 때문이다.

유근택 다시 읽기는 일상 담론에 관한 비판적 성찰과 그것으로부터의 탈출을 모색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먹으로 일상을 온전히 기록하고 떠내는 작가’(박영택, 1997), ‘육화된 지각체험으로서의 일상’(박천남, 1999), ‘일상의 평범한 모티브로 전통회화의 형식실험 지속’(오광수, 2000) 등 유근택에 대한 논평들은 어김없이 일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러한 비평들은 무엇을 그리는가에 대해서는 눈에 보이는 짧은 해답을 주었으나, ‘왜 그리는가’ 혹은 ‘어떻게 그리는가’에 있어서는 유근택 그림을 지나치게 소박한 것으로 만들었다. 90년대를 휩쓸었던 후일담 소설의 요들요들하면서도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돌이켜보면, 그것은 거대한 이야기가 지나고 난 후 우리에게 남은 일상의 그늘에서 잠시 쉬어가는 무기력함을 확대재생산했을 뿐이다. 그 방만한 진공상태는 문학뿐만 아니라 예술계 전반에서 일상담론의 모습으로 만연해왔다. 

일상을 그리는 화가 유근택의 면모를 장면과 사건 사이를 오가는 일탈의 화가로 읽어내는 일은 그를 역사와 현실, 일상과 일탈의 경계에 선 화가로 다시 만나는 일이 될 것이다. 임종을 한 달 여 앞둔 할머니 방에서 수십 장의 모필 소묘작업을 해낸 유근택의 지독한 그림 그리기를 생각해보라. 유근택이 읽어내고자 하는 일상이란 우리에게 발생하는 표피적인 사실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 숨쉬는 세상의 가장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모습인 것이다. 그는 이 속에서 얼핏 스쳐지나가는 장면과 사건들, 우리 모두가 느끼고 체험하는 삶 속에서 특별한 그 무엇을 찾아 공유하고자 한다. 이것은 그를 부유하는 일상이 아닌 사실 또는 현실에 착근한 화가로서의 힘을 가지게 한 저변의 힘이다. 이러한 저력은 적지 않은 화가들이 일상 담론에 매몰되어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중얼거리고 있는 것에 비해 탄탄한 수사로 일탈적 서사를 모색하는 근원이기도 하다.

2. 90년대 후반 이후 근 5년간의 유근택 그림은 이전의 것과는 상당히 달려져

일상이라는 화두뿐만 아니라 기법 면에 있어서도 90년대 후반 이후 근 5년간의 유근택 그림은 이전의 것과는 상당히 달려져있다. 특유의 툭툭 쳐내는 짧은 붓질은 이전의 거칠면서도 긴 붓질과 상당히 대조적이라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1991년 첫 번째 개인전에서 나타나는 정연하고 가지런한 굵은 먹선으로 윤곽을 뚜렷하게 살려낸 일련의 회화 작업들은 그의 출발이 탄탄한 사실적 조형에 있음을 돌아보게 한다. 선묘로 형상의 윤곽을 간략하게 담아내는 그의 이 시절 회화들은 당시 전형적인 형상회화의 어법을 좇아나간 것으로 보인다. 거친 붓질의 강한 먹선으로 역사의 장면들을 담아낸 1994년의 금호갤러리 개인전에서는 문자로 남겨진 역사를 사소한 일상의 사건 속에서 잡아내려 했는데, 당시의 유근택은 먹선의 강렬한 형식미를 칼맛으로 되살린 목판화 연작을 선보이는가 하면, 모필사생을 통해서 사실적인 풍경화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는 이러한 노력을 관념화 한 역사의식에 매몰될지도 모르는 ‘화가의 박제화 한 역사 의식’을 경계하기 위함이었다고 말한다. 또한 자신의 작업이 ‘인간적인 질서로 남겨지기를 바란다’(1997)고 고백하고 있는데, 이것은 장면과 사건들을 ‘체험하는 주체로서의 유근택’ 자신의 감성을 화가 정체성의 근원으로 세워두는 것으로 이어진다.

같은 해의 문예진흥원 개인전에서는 역사의 시간 축을 드러내는 여러 가지 상징들을 동시대의 기표들과 동등한 지위를 가지도록 배치함으로써, 시간의 축적을 통해서 존재할 수밖에 없는 현재의 자아를 끌어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 역시 같은 해에 열린 기획전 <일상의 힘, 체험이 옮겨질 때>에서 작가 자신이 쓴 서문에서는 ‘관념으로서의 일상이 아니라 몸으로 체험하는 경험으로서의 일상’에 대해 말하고 있다. 지난 시대의 강렬한 추억이 쓸고 지나간 후 작업실에 고립된 화가의 정체성을 부여잡고 고뇌하거나 전통회화의 재료와 기법에 매달려 그 안에 갇혀버리는 답보적인 상황을 벗어나고자하는 젊은 화가의 모습을 읽어낼 수 있다.

1999년 원서갤러리 개인전에서 보여준 10미터짜리 대작 <맹인을 이끄는 맹인>은 먹과 모필을 완숙하게 다루면서 역사적인 모티브를 가지고 서사적인 이야기를 끌어왔던 90년대 중후반까지의 표현주의 경향의 작업에 방점을 찍는 작품이다. 또한 이 기념비적인 작품은 거친 붓질과 선묘 중심의 격정적인 화면 운용으로 전통회화의 기법과 재료를 이어낸 계승자 유근택의 입지를 굳혀준 효자 작품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야심 찬 대작은 이후의 일상-장면-사건 그림들로 일관하는 유근택 그림의 반환점에서 만난 길손과도 같다. 그 전시 이후 유근택에게서 거대함이나 장중함 같은 것들은 찾아보기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을 퇴행이나 진화의 논점으로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거대함에서 소소함으로, 역사적 서사에서 일탈적 서사로 전환한 바로 이 점이 오늘날 유근택 그림 혹은 그의 그리기를 규정하는 좌표의 한 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붓을 옆으로 눕혀 툭툭 치고 지나가면서 먹과 호분을 사용해 흐릿한 형상을 만드는 형상 해체 작업이 이 전시를 기점으로 유근택의 손에 꽉 잡혔다. 오늘날 그의 전형적인 화면 운용 방법을 이루는 화풍이 본격적으로 선보인 것이다. 

이 전시의 출품작인 <창밖을 나선 풍경> 연작들은 아파트 앞 정원의 자잘한 나무숲에서 발견되는 조형적 운율들을 잡아내는 풍경화 연작이다. 물론 이 숲의 주된 대상은 나뭇가지들과 나뭇잎들이지만 그 숲 사이 오솔길을 오가는 사람들을 잡아내는 일을 통해서 그의 그림을 그냥 '풍경(landscape)을 그린 그림'이 아닌,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과 장소를 담은 장면(scene) 그림'으로 바꾸어놓았다. 특히 <길 혹은 연기>는 평면 위에 구현된 공기의 흐름을 잡아내는, 그래서 고전적 의미의 기운생동을 새롭게 구현해내는 ‘장면으로서의 풍경’의 전형을 이룬다. 이후 유근택의 시선은 아파트 창밖 정원에서 아파트 실내의 거실 바닥으로 옮겨간다. 아이가 어지럽게 펼쳐놓은 장난감들의 파노라마를 화폭에 옮겨놓은 그는, <어쩔 수 없는 난제들>이라는 제목을 붙여가며 자신이 체험하는 일상의 모습을 통해서 질서의 이면에 깔린 혼돈의 세계를 담았다. 질서와 비질서의 공존을 읽어낸 그는 이 작업을 이사와 정착이라는 가족 단위의 작지만 커다란 사건을 통해 관념적 서사에서 일상 혹은 일탈의 서사로 옮겨간 것이다.

 

이번 전시에 출품되는 연작들은 일상 이면의 모습을 환기시키는 그림들이다. 근작에서 보이는 변화의 조짐은 그가 생각했던 '대상과 그림과 화가의 관계'를 한 발 뒤로 물러서서 재정립하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대상과 그림 사이에 존재하는 화가 주체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예전의 풍경 사생 작업과 이번의 공릉 풍경 연작들이 가지고 있는 차이점들이다. 그는 이 차이점을 대상과 그림, 대상과 화가 사이에 어떠한 ‘언어가 발생한다’는 다소 난해하고 추상적인 말로 설명한다. 그가 말하는 언어의 문제는 다층적 의미 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그 무엇이나 어떤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인 듯하다. 달리 말하면 그의 시선에 포착된 풍경 속에서 특정 장면을 끄집어내는 과정을 관람자 주체가 공감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는 것이다. 관념적 풍경을 벗어나는 일은 유근택 그림의 첫 시작이자 마지막 마무리에 해당한다. 그의 그림이 90년대 후반 이래 지금까지 일상의 풍경으로 읽히며 호평을 받은 것도 그 이전의 역사 그림의 관념성을 벗어나 삶의 모습에 뿌리내리도록 의도해왔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야기를 담은 장면으로서의 풍경 작업들이 모필 소묘와는 또 다른 차원의 모티브를 다루는 것이라는 점을 말해두어야 하겠다. 그가 1990년대 초반, 신예 작가의 의기로 조선시대 역사를 소재로 한 서사적 작업을 펼쳤을 때, 그것은 그 이전 시대의 형상회화가 남긴 영향이기도 했거니와 큰 이야기를 걸고 들어갔던 막연한 그림 그리기의 관행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다. 그가 스스로 이 관념성을 탈피하기 위해 시작한 것이 모필 사생이었다. 마치 먹그림 그리는 사람들이 마음이 답답할 때, 또는 매일 같이 도 닦는 마음으로 사군자를 치듯이 그는 모필 사생 작업으로 관념성 탈피의 돌파구를 찾곤 했다. 일정 수준 이상의 높이를 설정해두고 그 경지에 대해 관념적인 언술 방식으로 접근해 나가는 이른바 동양화의 정신성에 의문을 제기한 것으로 보인다. 역사화 직후에 그린 임종 직전의 할머니 그림이 그 중 가장 대표적이다. 그가 할머니를 그린 것은 역사를 해석하고 인간을 탐구하는 작업이 문헌자료에 존재하는 기록의 역사가 아니라 할머니의 몸을 통해서 체현된 시간의 켜를 통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주류 역사의 이면을 찾는 일이었다. 할머니가 체험한 역사적 사건의 단편들, 역사적 시간대를 거쳐온 할머니 주변부의 사소한 장면들 속에서 역사를 일상의 모습으로 끌어낸 것이다. 할머니가 겪은 삶의 조건 자체와 그것에 대한 반응들을 통해서 거대담론으로서의 역사성을 잡고 큰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에서 탈피하고자 한 것이다.

그는 또한 대상과 화가의 일치를 향해 치열하게 그림 그리는 화가의 모습을 꿈꾸어왔다. 이러한 태도는 파주 하제마을 작업실의 앞산을 그린 100여점의 <앞산 연구> 연작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작업실 앞 작은 둔덕은 화폭에 담을 만한 변변한 바위하나 없는 민둥산이다. 그 산을 아침과 저녁, 비올 때와 맑을 때, 기분 좋을 때와 우울할 때 여러 장을 반복해서 그려둔 것이다. 같은 대상을 두고 지속적으로 쌓아올린 앞산의 변주는 한편의 장대한 서사시처럼 둔중하게 다가온다. 이 작업들은 낱개로 보면 평범한 소묘작업이지만, 모아놓고 보면 드라마틱한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평범한 산 이미지들로부터 그 이상의 힘을 얻어내는 것은 지속적인 그리기를 통해서 대상과 호흡하는 화가의 손길에서 나타나는 시간성의 켜를 들춰볼 수 있기 때문이다. 

<풍경의 속도> 연작은 그가 대전에 출강하던 시절, 매주 같은 시간대에 서울에서 유성까지 버스를 타고 이동하면서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그리겠다는 무모한 발상에서 시작됐다. 달리는 버스의 속력에 비해 화가의 시선이 머무는 순간을 포착하다는 것, 카메라가 아닌 화가의 손으로, 그것도 모필과 먹으로 대적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풍경의 속도이라는 주제의식으로 불가능한 그리기에 도전한 이 싸움을 지속한 결과 그는 10여미터에 이르는 대작을 선보였다. 이렇듯 앞산이라는 ‘저기 저 앞에 그냥 있는 산’의 모습을 집요하게 담아내거나, 버스 안에서 만나는 스쳐지나가는 그저 그런 풍경들을 긴 그림으로 잡아내는 과정은 대상과 화가 사이의 거리를 좁혀나가기 위한 치열한 전투의 과정이다.

가로변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볼품없는 일상의 소품인 전화박스 풍경 하나를 그려도 사물의 구조에 따라 매체적 특성을 잘 살리는 그의 섬세함이 돋보인다. 전화박스 유리창은 농묵으로 처리하고 나머지 부분을 호분을 섞어 희뿌옇게 처리함으로써 박스 내부와 외부를 재료적 특성에 빗대어 은유적으로 변별해내고 있다. 아파트 1층의 거실창문 밖 풍경 연작도 마찬가지다. 동일한 풍경을 반복해서 그려 낸 이 노작에서는 아파트 정원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의 차이로 인해 일상의 풍경에 대해 변주를 시도하고 있다. 분수 그림에서도 그가 그리려는 분수의 물줄기를 그리지 않음으로써 분수를 그려내는 방법, 거기서 여백의 미를 살짝 변용하는 재치를 엿볼 수 있다. 지루한 일상에서 발견하는 다양한 변주. 이것이 그의 일상 풍경이 보여준 묘미이다. 이렇게 전화박스, 아파트정원, 풍경의 속도, 앞산연구에 이르기까지 유근택은 그의 치열한 그리기의 대상으로 일상의 장면들을 포착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작가와 견자(見者) 모두가 합의하고 있는 사실이다. 문제는 그의 일상 그리기가 현대 사회의 전모를 읽어내어 일상성의 굴레를 벗어나 인간 존재의 본성을 탐문하고, 당대 삶의 모습을 읽어내는 것으로 어떻게 접근해 들어갈 것인가 하는 점에 있다. 

모필 소묘는 화가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도피처와도 같은 것이다. 그릴 그 무엇이 저기 있다는 사실 이외에는 아무런 전제 없이도 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대상을 읽어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이야말로 전통회화의 역사를 통해 축적된 형사와 사의를 넘나드는 경지의 첫걸음이다. 90년대 후반에 시작한 모필 소묘 작업은 박제화 한 시선을 넘어서는 소중한 일이었다. 자신이 만나고 있는 것들과 밀착한 그림들은 1999년에 원서갤러리에서 선보인 <창밖을 나선 풍경> 연작 이후에 유근택의 현재 모습을 만들어낸 든든한 밑거름이 되었다. 이 작업은 자신의 주변부를 화면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그의 노력을 잘 보여주고 있다. 흔히 볼 수 있는 화장실을 포착한 그림에서 그는 화장실이라는 대상 자체의 외형보다는 쌓여있는 벽돌에 대한 흥미진진한 탐구를 지속한다. <장면> 연작들은 집 앞 수위실이나 붉은 기둥, 페인트 칠 한 울타리 등의 소소한 사물들을 통해 먹색 가운데서 더욱 도드라져 보이는 화사한 원색의 힘을 발견해내기도 한다. 이렇듯 유근택이라는 화가 주체의 탐구생활은 지속될 것이다.

4. 유동하는 장면으로서의 사건

유근택의 탐구생활은 고정된 실체로서의 장면에 머무르지 않고, 유동하는 장면으로서의 사건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그가 다루는 사건들은 일상인 장면이라기보다는 일탈적 사건에 가깝다. 일상적 장면에서 소재를 얻고 있지만, 일상성을 넘어서는 일탈적 서사를 꿈꾸면서 화면 전반에 걸쳐 메타포를 깔아놓고 있기 때문이다.

이사하는 과정을 몇 장면의 실내풍경으로 잡아낸 <수평적 이사> 연작은 주엽동 아파트에서 홍제동 아파트로 수평 이동한 삶의 터전을 무심한 구도로 잡아낸 그림들이다. 텅빈 집의 공허함, 바닥에 어지럽게 널려있는 방 뺀 흔적과 짐 꾸러미들, 그리고 어느새 그 혼돈의 상황을 정리해내고 다시 일상으로 되돌아간 사건을 그려냈다. 카오스(chaos)에서 질서를 되찾아 나가는 일대 사건에 주목한 것이다. 이렇듯 일상 이면의 사건을 잡아내는 것은 일상적으로 만나는 수많은 풍경들 가운데 특별한 장면을 잡아내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읽어볼 수 있다.

<구석에서 일어난 세 가지 사건>은 애완견, 불, 검문 등의 특별하지 않은 사건을 담고 있다. 애완견의 활동 반경을 규정하는 가상의 울타리를 그려 넣음으로써 갇힌 존재에 대한 단상을 잡아내는가 하면, 정원 한구석에서 일어난 불길로 공기의 흐름을 이차원에 담아 죽음의 메타포를 담는달지, 골목 벽돌집 옆을 지나다가 갑작스레 벌어진 검문이라는 상황을 담아냄으로써 검문에 나선 경찰들과 당하는 사람, 그 상황을 시각적으로 증폭시키는 벽돌집 벽돌의 구조적인 관계들까지 끌어들이고 있다. <샤워> 연작 또한 무수히 반복되는 행위이지만 그 가운데서 문득 자신의 몸을 어루만지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하고, 발가벗은 인간을 둘러싼 그리드 구조의 타일벽면처럼 엄습해오는 세상의 무게를 느끼기도 하는 특별한 시간임을 포착하고 있다. 유근택의 최근작들이 일상과 비일상, 사건과 비사건의 사이를 배회하고 있다는 걸 감지해내는 데 이 작품은 상당한 근거로 작용한다.

장면과 사건 사이를 오가는 화가의 눈길이 절묘하게 뒤 섞인 그림이 <바닥 혹은 또 다른 정원> 연작들이다. 마루바닥에 어지럽게 널려있는 장난감 파편들을 또박또박 배열해놓고는 얼핏 스쳐 지나가는듯한 붓질로 쓱쓱 그려낸 이 장면들 속에는 사실은 철부지 아이의 천방지축 동심에서부터 전세계를 쥐락펴락하는 거대한 손길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메타포가 담겨있다. 흐릿한 형상의 획일화된 사물들은 스스로 낱개의 존재를 웅변하기도 하지만 결국 그 사물들이 혼돈 그자체로 세계를 설명해내려는 화가의 손길에 따라 작동하는 소도구들에 불과하다는 점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유근택의 시선이 일상을 담는 것 이상의 목표를 가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맥도날드 사은품 로봇, 인형 또는 뜯어진 인형 파편들, 세상의 온갖 모습을 담은 각종 장난감들이 즐비한 혼돈의 상태라는 점, 나아가 식탁, 옷장, 세면대, 장롱 등의 사물들과 폭격을 당해 불타는 집에 이르기까지 모두 장난감 크기와 같은 파편으로 그려냈다는 점, 게다가 인형 크기로 획일화 하여 아이의 발치에 널부러진 세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은 <바닥 또는 또 다른 정원> 연작을 두고 일상을 넘어 장면과 사건 사이에 존재하는 유근택의 좌표를 가늠하는 중요한 포인트이다. 사소하기 짝이 없는 마루 바닥의 파편들을 혼돈의 상태로 배열한, 그것도 아이의 발치에 깔아놓은 유근택의 시선은 충분히 비상(非常)하다. 장난감이기 때문에 몸이 분리되어 있어도 크게 이상해 보이지 않던 찢겨진 인형과 폭격 맞아 불이 붙은 건물이 한 화면 안에서 아이의 발치에서 깔려 있다는 것은 이 세상이라는 것이 한 없이 부질없는 짓거리들로 가득 차 있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다의적 해석을 유도하기 위한 장치로 가득한 바닥 그림을 통해서 우리는 유근택을 다시 읽는 중요한 단서를 확인할 수 있다.
 

유근택은 ‘대상과 작가 사이의 그 무엇에서 발생하는 언어에 주목하고 있다’고 말한다. 영상보다 강한 회화의 힘, 바로 그것 말이다. 문자 언어를 넘어선 회화적 언어의 서사적 구조에 대한 그의 탐색은 일상의 모습을 넘어선 장면과 사건 사이에 존재하는 예술가의 모습을 새삼 일깨워나가는 과정이다. 예술가적 상상력과 일탈적 판타지를 담은 창의적 존재로서의 예술가상을 밀어붙이는 힘을 모으기 시작한 것으로서, 그의 그림은 역사에서 일상으로 변모해온 짧지 않은 시간을 거쳐, 다시 장면과 사건 사이를 분주히 오가며 회화 언어의 서사적 구조에 대한 관심을 펼쳐낸 것이다. 결국 유근택이 노리는 것은 대상과 그림 사이에서 작가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면서 작가의 이야기 구조를 은연중에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 
유근택은 일상을 탐색하고 기록하는 화가이기보다는 자신의 회화적 여정 가운데 하나로 일상을 포착하면서도, 그 속에서 특정한 상황의 그 장소가 발산하는 장면이나 사건의 맛을 잡아내는 화가이다. 따라서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일상(성)을 통해 당대(성)를 구현하는 것이 최대의 관건일 텐데, 이것은 일반화된 일상(담론)의 미학을 넘어선 유근택의 작업을 변별해내는 잣대이기도 하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서, 그것도 전통 회화의 방법을 이어나가는 화가로서 이 세상을 대면하는 유근택은 이 시대에 예술적으로 저항하는 소수자 무리 가운데 한 사람이다. 뉴미디어, 디지털미디어, 매스미디어 시대에 대한 예술적 저항은 아날로그 방식의 그림 그리기를 고집하는 것 자체로도 충분하다. 그것도 먹과 모필과 종이를 가지고서 말이다. 그에게 있어 먹과 종이와 붓은, 그 자체로는 하등 문제시 또는 물신화 할 이유가 없는 그저 평범한 삶의 조건이 뿐이지만, 세상의 조건은 그와는 다르다. 이전에 서양화로 불렸던 기름물감과 마포천의 그림들이 회화로 일반화 할 때, 이전에 동양화라고 불렸던 지필묵의 그림들은 여전히 동양화이거나 한국화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현대미술에 있어서 전통회화의 계승자들은 한국(동양)화 또는 한국(동양)미술의 미학을 찾아나가는 데 많은 무게를 두고 있다. 매체 자체가 이미 작가의 정체성을 규정할 뿐만 아니라 회화의 정신적 체계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있기 때문이다. 유근택의 장점은 이러한 삐뚤어진 현대미술의 구도로부터 자유롭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한국(동양)화가이기보다는 현대미술의 동시대를 헤쳐 나가는 그냥 화가이다.

유근택을 현대미술의 당대적 보편성을 가진 화가로 보는 것과 비슷한 견지에서 말하자면, 그는 일상을 그리는 화가라기보다는 일탈과 판타지를 꿈꾸는 예술가로서의 화가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일상을 넘어 일탈적 장면과 사건 사이를 오가는 예술가 유근택의 면모를 확인했다. 일상이라는 뭉뚱그려진 단어 안에는 보다 정교하게 다듬어서 살펴봐야할 몇 가지 얘깃거리가 있다는 점도 살펴봤다. 일상과 장면, 일상과 사건, 장면과 사건, 일상과 일탈, 현실과 판타지 등과 같이 서로 맞서있으면서도 붙어있는 것들 말이다. 놀라운 속도로 진화하는 정보체계와 가치체계 속에서,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를 가늠하기조차 녹록찮은 세상에서 움직이는 듯 멈춰있는 장면과 멈춘 듯 꿈틀거리는 사건 사이를 오가는 화가의 눈을 몇 마디 말로 단정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다만 우리가 염두에 둘 수 있는 것은 지리멸렬하게 반복되는 일상의 굴레 앞에서 그 암연에 맞서 분연히 대결하는 화가 유근택의 아름다운 투쟁이 일상성의 굴레를 넘어서 당대성을 전취하는 데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치이다. 한 발짝 더 나아가 일상을 넘어 일탈의 경지를 넘나들며 예술적 판타지를 꿈꾸는 예술가 유근택이 모습 또한 빼놓지 말고 기다려봐야 대목이 아니겠는가. 불혹의 나이를 앞둔 그는 보여준 것에 비해 보여줄 것이 훨씬 더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김준기 / 사비나미술관 학예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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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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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g2 조용하지만 호소력 있는그림이네요. 작가의 그림은 그림속 인물이나 사건보다 풍경 위주이지만 그 풍경이 결국 사건과 인물을 부각시키는..... 감정이 증폭되는 느낌입니다. 2010.10.07 18:47:44
slrzns 정말 상상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인거 같습니다. 2010.09.29 13:4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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